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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씨에 2박 3일 동안 열린 집단상담프로그램은
사이코드라마 형식으로 진행됐다. 내가 맡은 집단의
청소년들은 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 학생까지 총 10명.
이곳의 아이들은 평범해 보이는 청소년들이었지만 제 또래 아이들에 비해
훨씬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10명이 돌아가면서 주인공을 맡으며
자신의 삶을 연극으로 풀어 나가는 사이코드라마를 진행하는 동안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던
영찬이(가명)가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영찬이에게 누군가 10억을 준다면
무엇을 하겠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병으로 누워계신 할머니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수술을 받게 하고 싶어요. 집에 있는 6마리 강아지에게 맛있는 사료도 사주고 싶고요.”
부모님이 어디론가 사라진 이후, 강아지와 할머니가 이 아이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렇듯 조손가정의 아이들은 돌봐줄 안전망이
확실하지 않기에 언젠가 조부모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항상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집단상담프로그램에 참가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모님의 이혼, 도주, 사망 등의 이유로 청소년 시기에 마땅히 받아야 할 부모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곳 태백의 조부모님들은 대부분 광촌에서 오랫동안 생계를 꾸려나가며 진폐증으로 사망하거나
건강에 위협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희망을 끈을 놓지 않으려는 아이들의 모습은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집단상담을 진행하면서 만난 ‘사하'라는 별명의 초등학생도 내 삶의 스승 중 하나다. 사하의 부모님은
정신지체 장애인이고 할아버지도 정신지체를 앓고 있다. 부양하기가 힘들어 할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었던
할머니는 사하를 데리고 다른 가정에 재혼을 했다. 사하는 다행히도 새로운 할아버지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있다. 하지만 그 할아버지 또한 손자 4명을 키우고 있는 전형적인 조손가정의 조부모다.
초등학교 2학년인데도 글을 못 읽는 사하. 앞으로 성장해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항상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런 걱정을 다 잊게 하는 소중한 보물이 있다. ‘천사의 웃음보다 순수한 미소'가 그것이다.
“선생님 사랑해요”하며 환하게 웃는 사하를 보면 세상에 찌들어있던 무거운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져 나도
따라서 웃게 된다. 힘든 일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사하를 떠올리며 힘을 내기도 한다.
학업, 사회생활, 취업, 자녀양육 등으로 잃었던 주변의 소중한 웃음, 행복을 한없이 느끼게 하는 그 미소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 결국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사하처럼 웃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조손가정의 아이들을 돕겠다는 결심은 어느새 나를 변화시키겠다는
결심으로 바뀌어있었다.
밝고 아름다운 꿈이 있어도 그 꿈을 이루도록 지원해주는 사회적 복지망이 전혀 없는 이 사회에서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주는 길은 멀기만 하다. 그러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꿈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들의
의지를 지켜보면서 마음 한 구석에 오늘도 희망의 씨앗을 심어본다.